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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태국 왕조의 화려한 기록, 아유타야

by MASTERPIECE♪ 2021. 9. 22.

아유타야의 특징

타이의 수도 방콕 북쪽, 수코타이에 이어 시암 왕국의 두번째 수도가 된 아유타야는 1350년경에 건립되었으며 18세기에 버마인들에 의해 파괴 되었습니다. 또한 불교를 숭배했던 우통 왕가가 새로 건국하여 400년 동안 유지되었으며 프랑과 거대한 수도원들로 구성되어진 유적들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의 '불멸'이라는 의미를 지닌 오래된 도시로 롭부리 강, 차오프라야 강이 만나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옛날부터 크메르 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입니다. 

 

태국 사람들의 왕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유별납니다. 현재 태국에서 사용되는 모든 동전과 지폐에 불교사원과 국왕의 초상화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주요 관공소,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들에도 국왕 부부의 사진이 걸려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태국의 거리와 건물의 벽도 국왕과 왕비, 공주 등 많은 왕족의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비록 태국 헌법에는 국왕이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되어있고 실제로는 총리가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이든 누구나 왕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절대 권력을 통한 정치와 무역

태국의 최초 왕조는 아코르 왕조가 다스렸던 수코타이 왕조인데 13세기 초 세워진 수코타이 왕조는 15세기 중반 멸망하였습니다. 멸망에 이르기전까지 현재 태국 중북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여러 왕가를 다르셨으며 200여년 동안 태국을 다스리던 수코타이 왕조의 세력이 약해지자 그 틈을 이용하 우통 왕가가 남쪽 아유타야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왕국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사방이 강으로 둘러쌓인 좋은 입지조건으로 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가 좋았으며 무역을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좋았기 때문에 버마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400여년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유타야에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우통왕가는 종교, 문화 등 여러분야에서 수코타이 왕조의 정책을 따랐지만 왕과 신하가 얼굴을 맞대고 정책을 함꼐 논의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아유타야 왕들의 절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왕을 신격화 시킨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신하들이 왕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도록 금지하였고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지위를 막론하고 즉각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이는 크메르 족의 전통을 따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자유로운 상거래를 허가하지 않고 모든 경제 활동을 왕의 허락 하에 진행하도록 하였으며 세금 또한 엄청났다고 합니다. 결국 아유타야 왕조는 절대 권력과 더불어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었고 이렇게 경제권을 장악하면서 중국, 스리랑카 등 주변 나라와의 무역도 늘려갔습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 국가와도 교역하며 더욱 막대한 경제력을 키웠으며 그 중 일본과도 무역을 활발히 하여 1,000명이 넘는 일본인이 사는 일본인 거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아유타야 유적의 기록

이렇게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가지게 된 아유타야 왕조는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건축물을 건립하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불교 사원이었습니다. 사실 아유타야에 남아있는 사원들은 버마의 침략으로 인해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어 유적지만으로 옛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와트 마하탓은 아유타야를 대표하는 유적지로 크메르 양식과 롭부리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흥미로운 탑과 부처상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유적은 보리수 나무 뿌리 아래 둘러쌓인 불상인데 목이 잘려 얼굴만 남아있지만 그 미소가 아주 인자합니다. 그 반대편에는 와트 라차부라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거대한 탑 양쪽으로 사리를 보관해 둔 2개의 체디가 있는 사원입니다. 체디 지하에 그려진 벽화엔 석가모니의 삶, 불교를 상징하는 동물, 왕족들의 생활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유타야는 새로운 수도인 방콕을 건설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는데 왕궁과 사원을 건설할 자재가 부족하여 아유타야에서 방콕으로 자재를 옮겼으며 때문에 400곳이 넘는 파괴된 유적지에 자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것은 방콕의 초기 건축물의 대부분이 아유타야에서 가져온 자재일 것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버마군에게 약탈당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물, 보석 등도 방콕으로 옮겨져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오늘날 태국 국민들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차크리 왕주의 뿌리가 바로 아유타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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