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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별궁, 쇤부른궁전

by MASTERPIECE♪ 2021. 9. 8.

쇤부른궁전의 역사

피셔 폰 에르라흐가 황제 요제프 1세를 위해 1696년 설계한 후 1700년경에 완성한 쇤브룬궁전은 여름철 별궁으로 만들어졌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니콜라우스 파카시가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원래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우연히 샘을 발견하면서 성을 세웠었지만 오스만 튀르크 군에 의해 파손되어 1696년에 레오폴트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티브로 하여 새로운 성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대궁전으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제하여 건축되었습니다.

 

대리석 열주랑에서 바라보는 빈 시가지와 교외의 아름다운 전망과 프랑스식 정원이 유명하며 1,441개의 방이 있고 대부분의 방은 로코코 양식으로 실내장식이 꾸며져 있습니다. 1805년과 1809년에 나폴레옹 1세가 이 궁전에 머물렀고 나폴레옹과 합스부르크왕가의 마리 루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라히슈타트 공작도 여기서 생을 마감했으며 요제프 1세도 이 궁전에 많이 머무른 인물입니다. 

쇤브룬궁전의 구성

빈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프랑스의 정원의 구조를 띠고 있는 쇤브룬궁전은 드넓은 면적에 평명 대칭의 주 정원과 총림, 멀리 잔디 언덕을 배치하였습니다. 특히 쌍두의 독수리로 장식된 이궁은 넓은 면적의 궁원을 가지고 있고 근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여 명문 합스부르크왕가를 상징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쇤부른의 뜻은 '아름다운 샘'이란 뜻으로 1619년 신성로마제국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하던 도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원은 1569년 막시밀리안 2세가 수렵장으로 쓰기 위해 동물원과 정원을 만든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약 처음 설계를 맡은 피셔의 원안이 그대로 실현 되었다면 쇤브룬은 베르사유 궁전에 버금가는 찬란한 건축물이 되었겠지만 이 계획은 재정상 터키군의 위협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사용해야하는 궁정의 입장에서 실현시키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피셔는 처음의 계획보다 훨씬 소박한 2안을 제안하였는데 궁전을 구릉의 아래에 조영하고 주 건축에 양 날개를 붙인 모양이 되었다. 조경 또한 중요한 남측 구릉의 글로리에테는 1775년이 되어서 궁정건축가 호엔베르크에 의해 건립되었고 주변도 이 때 현재와 같은 형태로 수정 되었습니다.

 

1.76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정원 중앙의 대칭형 프랑스풍 화단 및 양쪽의 총림은 1705년 정원설계가인 장 트레헤트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주축선은 성의 정면 파사드에서 남에서 거의 똑바로 달려 바다의 신을 상징하는 넵튠 분수에서 끝나며 거기에서 지그재그의 원로를 경유하여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고 황제 군대의 영광을 상징한 신고전주의 풍의 글로리에테로 올라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쇤부른 궁전의 특징

쇤브룬궁전의 길이는 180m에 달하고 외벽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취향에 따라 짙은 황금색으로 덮여있습니다. 드넓은 부지 안에는 마차 박물관, 궁전 극장, 식물원, 동물원, 정원 등을 갖추고 있으며 특히 쇤브룬궁전의 동물원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카를 대공이 1752년 개장하였습니다. 이 동물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알려져 있고 1765년 요제프 2세가 일반 시민에게 공개 하였습니다. 1906년에는 세계 최초로 동물원 내 코끼리 교배에 성공하였고 동물 전시 이외에도 교육, 생물종 보전, 자연보호 등을 함께 수행하고 있으며 1992년 민영화가 된 이후에는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쇤브룬궁전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나고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며 궁전 내부의 서관에는 프란츠 요제프의 황후인 엘리자벳의 살롱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이 있습니다. 또한 동관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카를 대공의 살롱이 있습니다. 

 

거울의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어린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유명한 장소이고 합스부르크가의 마리 루이즈와 결혼한 나폴레옹의 방도 있는데 나폴레옹은 이 방을 사령부로 사용하며 빈을 정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실각 후 그 아들이 이 방에 격리되어 병사하게 된 비운의 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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