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색이 금지된 성
자금성은 1407년에 건축이 시작된 명조와 청조의 황제 궁전으로 건축하는데 14년이 걸렸으며 20만명이라는 대규모의 인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자금성의 이름의 뜻은 한자로 '자금성'이란 말은 자주색이 금지된 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황제의 허가 없이 누구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그만큼 황제의 권력과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깊이 6m 해자와 높이 10m의 벽에 둘러쌓여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 단지는 총 넓이가 약 72ha에 이르며 약 800채의 건물, 8,880개의 방이 있습니다.
자금성은 두 지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남쪽구역인 전조는 황제가 매일 정무를 보는 곳이었고 북쪽구역은 황제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내정이었습니다. 건물들중 5채의 큰 전당과 17채의 궁전이 있으며 소재는 목재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때문에 자금성 안에 오래된 목조 건물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모여있고 지붕은 전통적인 왕의 색깔인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어화원이란 큰 정원은 황제와 황후가 쉬면서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만든 정원 입니다. 다양한 대자연의 경치를 압축시켜 놓은 곳으로 자금성에서 유일하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대표적 건물로는 황제가 매년 1월 1일 도교의 수신에게 화재로부터 궁궐을 보호해달라는 제사를 올렸던 흠안전과 인공봐위로 만든 퇴수산이 있습니다. 특히 퇴수산은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금성의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자금성의 의미
이렇듯 자금성은 거대한 규모로 도시속에 지어진 하나의 도시라고 할 수 있으며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국 고대 사상 및 전통을 계승하고 잇기 때문에 과거 중국 왕조의 문화와 절대 권력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문화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이 곳을 세상에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명나라 멸망 후 10명의 황제들은 자금성을 소재지로 삼았는데 1912년 신해혁명에 뒤이어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푸위가 퇴위한 후 결국 박물관이되어 많은 보배와 진귀한 물건들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유물의 일부는 국공내전 동안 대만으로 옮겨지기도 했으며 중국의 공산당 정책이 완화되면서 중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찾는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건축 박물관이자 역사 박물관이며 종합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금성은 명나라 때 지어진 건물들이 낡아져 청나라때 고치고 새로 보수하여 명나라 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기본 구조는 물론이고 자재와 장식 등 모든 것을 명나라 때 건축을 바탕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자금성 주변의 유적지
자금성 동남쪽에 위치한 천단은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던 곳으로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쌓여있고 북쪽은 원형, 남쪽은 사각형으로 되어있는 특이한 공간입니다. 이 공간의 의미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고대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한 천단 최고의 명소라고 할 수 있는 기년전은 중국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합니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나무로만 완성한 건물이며 3층 지붕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무엇보다 기년전과 원구단 사이에 있는 벽인 회음벽에서 반사되는 소리가 되돌아오는 현상은 아주 신기한 경험입니다.
중국 뿐 아니라 우리나라, 일본 등 동남아시아에 큰 영향을 끼친 유교는 공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학문인데 춘추시대 때 태어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공묘 대성전이 있습니다. 대성전은 자금성 태화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건물이고 황제가 사는 곳 말고는 누구도 황금색을 사용할 수 없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황금색이 허용된 건물입니다. 특히 거대한 돌기둥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노는 모습을 새긴 운룡석주는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물론 자금성에는 흥미로운 곳이 참 많고 멋진 장소도 많지만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느끼고 한 눈에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직 자금성 북쪽, 경산공원 정자에 가야 합니다. 이 정자에서 자금성을 바라보면 완벽하게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는 구조와 형태가 한 눈에 들어오며 도시속에 지은 또 다른 도시라는 사실이 매우 실감납니다. 또한 높은 해자와 성벽을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하며 해자와 신무문,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사각 누대는 자금성이 궁궐과 성의 역할을 동시에 가졌던 공간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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